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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구조

컴퓨터의 역사 - 기계식 계산기의 시대

by kkong93 2022.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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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는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전자 제품 중의 하나이고 여러 매스컴을 통해 제일 많이 듣는 용어 중의 하나이다. 컴퓨터는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고 생활필수품이  지금과 같은 컴퓨터가 나오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수학자들에 의해서 복잡한 수치를 처리하려는 시도로써 시작되었고 이러한 시도는 주로 하드웨어에 의존했으나 하드웨어의 발전이 뒤따라주지 못해 직접 만들 수는 없었다. 그 이후 전자공학의 발전과 하드웨어 가격의 하락으로 꾸준한 발전을 가져왔으며, 하드웨어에만 치중하던 연구는 사용자 측면에서 고려한 소프트웨어의 개발로 연결되었다.

 

1.1.1 컴퓨터의 역사

(1) 기계식 계산기의 시대

고대 바빌론에서 고대인들이 셈을 하기 위하여 손과 손가락을 사용하여 땅에 적당한 깊이의 작은 구멍을 몇 개 파고 그 안에 조약돌이나 조개껍데기 등을 나타내고자 하는 수만큼 담아서 표시했다. 염주 알이 쓰이기도 했으면 이후에 주판으로 발전되었다. 주판이 컴퓨터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컴퓨터 하고는 전혀 다르지만 수치 처리를 위해서 개발되었다는 이유에서 컴퓨터의 효시로 보고 있다. 주판은 주로 동양에서 많이 사용되던 수치 처리용 기기였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 초까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자동 계산용 기계는 1642년에 프랑스인 블레이 파스칼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파스칼은 세금 수금원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 세금계산서의 긴 항목을 더하는 일을 하였다. 이러한 일은 그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지루한 계산을 하는 새로운 기계를 생각한 끝에 파스칼린이라는 계산기를 만들었다. 이 계산기는 0에서부터 9까지 표시할 수 있는 10개의 톱니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 톱니바퀴가 회전하여 숫자의 가감산을 하도록 만들어졌다. 이 계산기는 상업용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수치를 계산하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파스칼린 이후로 약 30년 전후인 1673에 라이프니츠가 만든 사칙 연산을 수동으로 완전히 할 수 있는 범용 계산기를 만들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탁상 계산기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계산기는 현재의 컴퓨터와는 사칙 연산을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매우 달랐다. 1800년대에 영국에서 태어난 찰스 바베지에 의해서 현재와 거의 같은 원리로 동작하는 컴퓨터가 설계되었다. 바베지는 박사과정 중 아주 많은 복잡한 수식을 처리해야 했다. 바베지는 자동 인형으로부터 힌트를 얻어 새로운 형태의 컴퓨터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였다. 정부의 지원으로 미분 엔진 이라는 기계를 설계하였다. 이 연구는 십여 년 지속되었으나 완성하지는 못하고 설계로만 끝났다.

 

바베지는 미분 엔진의 제작에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연구하였다. 그 결과 해석기관이라고 불리는 현재와 거의 흡사한 컴퓨터를 설계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그 당시의 기술로는 만들 수가 없어서 그는 미완성으로 끝내고 말았다. 이 계산 장치는 범용적인 자동 축차 방식의 계산기로서 오늘날의 계산기와 비슷한 기억 연산, 제어 및 입출력의 기능을 갖도록 설계되었으며 4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술연산을 담당하는 밀과 연산용의 기억기구인 스토어, 수의 전송과 동작 순서의 제어를 담당하는 제어기구, 그 밖에 카드를 사용한 입출력기구 등이었으며, 특히 출력은 연판에 의한 인쇄를 생각했다. 그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실현되지  연산의 순서를 자동으로 제어하는 방법은 오늘날 전자계산기의 원리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기계의 개발에는 유명한 시인인 바이런 경의 땅 오거스트 에이더 바이런이 오랫동안 베비지의 동료로서 연구하였다. 에이더는 수학자로서 베비지가 어려움에 부닥쳐 있을 떄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많은 다른 과학자의 냉소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에이더는 세계 최초의 여성 컴퓨터 과학자라고 할 수 있으며, 훗날 그의 이런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프로그램의 이름을 Ada라고 하였다.

미국에서는 1790년부터 10년마다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왔으나, 자료분류 및 분석에 7년이나 걸려 국세조사의 의미가 없게 되므로 이의 개선이 필요하게 되었다. 1887년여론 조사국에 입사한 홀러리스는 여론조사 자료의 정리작업이 늦어지는 원인이 주로 자료의 체계적인 분류와 신속, 정확한 집계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카드 분류기와 회로 개폐장치 및 기계적 계수기로 구성된 펀치카드 시스템을 고안하였다. 이것을 사용함으로써 여론조사 자료정리작업을 2년 정도에 끝낼 수 있었다. 

홀러리스의 펀치 카드 시스템 발명의 중요성은 자료의 내용을 펀치카드에 천공함으로써 자료의 내용이 천공된 구멍의 유무로서 부호의 형태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도 이것이 조금씩 변형된 OMR, OCR, MICR 등이 이용되고 있다.

 

(2) 전자식 계산기의 시대

기계식 계산기는 기술력과 자금 부족으로 인하여 상업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계산기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며 국가에서도 컴퓨터 산업에 관심을 갖게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수학자 알란 튜링은 튜링머신을 제안했다. 튜링머신은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던 중 인공지능의 튜링 검사를 제안한 것이다. 그 이후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하여 릴레이를 허용하여 암호를 해독하는 암호 기계를 제작하였다. 암호 기계는 후에 진공관으로 제작되어 빠른 속도로 암호를 해독할 수 있었다.

1937년에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 교수인 호워드 에이큰이 IBM사의 토마스 왓슨의 지원으로 범용적인 전기기계식 컴퓨터를 설계 제작하여 "자동 순차 제어 계산기"라고 불렀다. 실제로는 1994년에 완성되어 사용되었다.

72개의 톱니바퀴, 3000여 개의 릴레이, 1000마력의 모터를 사용하여 23자리의 10진수 계산을 수초 이내에 할 수 있었다. 이 컴퓨터는 오늘날 컴퓨터의 원조가 되었으며, 명령과 데이터를 종이테이프에 천공하여 부여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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